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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의 환영이 메슥거리는 정신을 어지럽게 헤엄쳐 다녔다. 본문
지구의 환영이 메슥거리는 정신을 어지럽게 헤엄쳐 다녔다. 그의 상상력으로는 지구 전체가 사라져버렸다는 충격을 도무지 느낄 수가 없었다. 그건 너무나 거대한 일이었다. 그는 부모님과 누이동생이 사라져버렸다는 생각을 하며 감정선을 자극해봤다. 아무 반응도 없었다. 자신과 친했던 그 모든 사람들을 생각해봤다. 아무 반응도 없었다. 이번에는 이틀 전 슈퍼마켓에서 자기 앞에 서 있었던 전혀 모르는 사람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자 갑자기 칼에 찔린 듯한 아픔이 느껴졌다. 슈퍼마켓이 사라졌다.
(중략)
영국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그 사실을 이해했다. 어쩐 일인지 그는 그걸 이해할 수 있었다. 다른 걸 시도해봤다. 미국도 사라졌다, 하고 그는 생각했다. 감이 오지 않았다. 작은 것부터 시작해보기로 했다. 뉴욕이 사라졌다. 반응이 없었다. 원래 그는 뉴욕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심각하게 믿어본 적이 없었다. 달러는 이제 영원히 하락해버렸군. 그는 생각했다. 그러자 조금 오싹해졌다. 험프리 보가트 영화들이 모두 싹쓸이 당해버렸어. 그는 혼잣말을 했다. 그러자 심한 충격이 왔다. 맥도날드, 그는 생각했다. 맥도날드 햄버거 같은 것도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졸도했다. 몇 초 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어머니 생각을 하며 훌쩍거리고 있었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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